가보지 못한 곳의 맛이 어느새 나의 취향이 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실향민 3세대가 부모님의 기억을 통해 물려받은 '기억 속의 식탁'을 기록하는 이야기, 그 첫 번째는 한겨울에 더욱 특별해지는 '김치말이 국수'입니다. 누군가의 사무친 그리움이 만들어낸 이 음식은 단순한 별미를 넘어, 잊혀가는 고향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한겨울, 김장독 김치로 즐기는 별미
“누가 냉면을 여름에 먹어, 김칫국물에도 살얼음이 끼는 한겨울에 먹어야지.” 겨울이 되면, 어머니와 나는 이가 덜덜 떨리는 겨울 맛에 뭉칩니다. 강경 겨울 냉면파인 우리는 한겨울에도 얼음물이, 아이스커피가, 새콤달콤한 김치말이 국수가 제맛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산에서 눈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유년기를 보낸 내가, 영하의 추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고집하는 '얼죽아'가 된 기원을 굳이 찾자면 할아버지의 김장독에서 그 답을 찾아야 합니다.
이북 음식, 어머니의 위로가 되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실향민 2세대입니다. 함경도에서 전쟁통에 고향을 떠나야 했던 외할아버지와 원산에서 피난길에 부모를 잃고 소녀 가장이 되었던 외할머니. 두 분이 서울에서 만나 부산으로 피난 내려와 잠시 자리를 잡았던 곳에서 어머니는 행복한 결혼 생활과 시집살이 속에서 스스로가 이방인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마음을 달래기 위해 만든 음식이 바로 김치말이 국수였습니다. 김치말이 국수는 슴슴하게 양념을 하고 국물이 많이 생기는 시원한 김치와 동치미로 만드는 이북 음식입니다.
할아버지의 기억, 아버지의 국수

함경도가 고향인 외할아버지도 한겨울이 되면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 오라고 시켰습니다. “구정 즈음이 되면 춥잖아. 우리는 김장 김치에 큼직한 무를 많이 박아 넣었거든. 차갑고 늦은 밤에 아버지가 국수나 한 그릇 먹자고 하면 푹 익은 무 한 덩이를 꺼내서 채를 썰고, 얼음 섞인 국물을 떠서 깨소금, 참기름을 뿌리고.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국수를 뜨끈한 온돌방에서 먹었지. 제대로 만들 때는 고기를 삶아서 맑은 육수를 내고 청수냉면 소스를 넣기도 했는데, 그러면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렸어.” '이랭치랭(以冷治冷)'을 대표하는 별미인 김치말이 국수는 김장 후 겨우내 집에 있는 재료로 간단하게 만들 수 있어 실향민 1세대의 일상적인 가정식이었습니다.
변주되는 맛, 사라져가는 기억
슴슴한 김칫국물, 동치미 국물에 물을 섞거나 북한식 냉면에서 주로 그러듯이 고기를 삶아낸 육수를 섞어서 만듭니다. 고명으로는 김치나 절인 무를 송송 썰어서 양념한 것, 혹은 육수를 낸 고기를 찢어서 올리고, 소면 대신 메밀면을 사용하기도 하며, 새콤달콤한 양념을 더 해 사계절 내내 입맛을 당기도록 변주하기도 합니다. 특히 실향민의 경제적 터전에 자리 잡은 이북식 음식점에서 후식 식사 메뉴로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온 친척이 모인 명절 차림 상처럼 기름진 음식을 잔뜩 먹은 후에 개운하게 먹기에도 이만한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운 친정을 떠올리며 어머니가 만든 김치말이 국수는 이방인이라는 실감만 남겼습니다. 빨갛고 진하게 양념한 남쪽의 김치는 어머니가 먹고 자란 김치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특히, 멸치젓과 조기가 들어가 비린 맛이 강했습니다. 못내 헛헛한 마음을 시장 한 켠, 친정어머니의 고향 이름이 붙은 가게에서 달랬습니다. 나는 겨울에 김장독에서 김치를 꺼내 김치말이 국수를 만들어 먹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김치냉장고에 김치를 보관했으니까요. 하지만 실향민 2세대들이 부모에게 들은 고향 이야기를 자신의 기억처럼 간직하듯, 나 또한 어머니의 추억을 내 기억인 것처럼 머릿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북식 음식을 파는 가게에 가면 늘 김치말이 국수를 시킵니다. “어머니가 정말 좋아할 텐데.”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내가 만나본 실향민 3세대는 대부분 본인이 실향민 3세대라는 자각조차 없습니다. 북한은 이미 갈 수 없는 곳이 된 지 오래라, 조부모님의 고향도 새로운 터전이 대부분이고, 그저 대화하다 보면 어릴 적 경험한 음식이나 입맛 취향이 비슷해 “혹시…?” 하고 물어보면 “아, 우리 할아버지가”라고 답하는 정도입니다. 글을 쓰며, 어머니에게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오늘은 동치미 무를 채 썰어서 국수를 만들어 먹었어.’ 어머니도 이제 서울보다 부산에 산 기간이 더 깁니다. ‘그 맛’은 점점 흐릿해지고, 국수를 먹자는 말에 온 식구가 움직이던 순간도 기억으로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록하는 것입니다. 조부모에게는 생존이었고, 어머니에게는 위로였고, 우리에게는 사라지기 직전의 언어인 그 음식의 일상을 기억하는 사람이 남아있을 때.
기억 속 레시피: 김치말이 국수 만들기
재료

푹 익은 김치, 동치미 국물 (또는 맑은 육수), 소면, 설탕, 참기름, 깨소금, (선택 사항: 무 절임, 삶은 고기)
만드는 법

- 푹 익은 김치 무를 꺼내어 결대로 가늘게 채 썬다.
- 채 썬 무에 설탕 약간과 참기름, 깨소금을 듬뿍 넣어 조물조물 무쳐 향을 돋운다.
- 소면을 쫄깃하게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사리를 튼다.
- 그릇에 면을 담고 살얼음이 낀 국물을 부은 뒤, 양념한 고명을 넉넉히 올린다.
- 김치말이 국수는 실향민 1세대가 겨울철에 김장 김치와 동치미 국물을 활용해 간단히 만들어 먹던 이북 음식입니다.
- 슴슴한 김칫국물과 살얼음 낀 국물, 그리고 쫄깃한 면발이 특징이며, 온돌방에서 먹으면 별미였습니다.
- 어머니의 기억 속 김치말이 국수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위로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세대를 거쳐 추억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 만드는 법은 푹 익은 김치 무를 채 썰어 양념하고, 삶은 소면에 살얼음 낀 국물과 고명을 얹어 완성합니다.